딕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다. 깨끗이 빨아 다림질한 모슬린 시트가 딕의 손아귀에서 무참하게 구겨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은 가쁜 호흡소리만을 제외하면 조금의 소음도 없이 조용했다. 그 약간의 소음마저도 그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라졌다. 그 정적을 딕은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발작적으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바닥에 내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음시계가 카펫위에 내팽개쳐졌다. 식은땀이 등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감각이 오싹했다. 그는 몸을 웅크린채 무릎을 감싸안았다.
웨인저의 정원에 브루스가 앉아있었다. 군데 군데 그늘진 응달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지만 날씨는 놀랄정도로 포근했다. 내려쬐는 햇빛이 기분 좋게 피부를 달궜다. 마른 잎새 사이로 새로난 연녹색 어린 풀잎이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 헐벗은 나무의 껍질의 툭 벌어진 틈새 사이로 봄눈이 피어났다.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평온하고도 행복으로 가득찬듯한 모습이라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들과 평온이라는 것은 글쎄, 아마도 그들이 죽기 전에는, 아니 죽은 이후에도 매우 거리가 멀지 않을까 싶은 것이었다. 창백한 브루스의 얼굴 위로 봄 햇살이 떨어져내렸다. 햇빛을 거의 받지 않은 흰 피부와 광택도 없이 새까만 머리카락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죽은 듯 잠들어있었다. 기척에 예민한 브루스의 잠자는 모습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동시에 이렇게 가까워질 때 까지 일어나지 않을정도로 피로가 쌓여있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 문득 위화감을 눈치챘다. 미동도 없는 브루스. 호흡소리나, 하다못해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저도 모르게 크게 한발 물러났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전혀.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지 않는 풀잎. 울지 않는 새. 시간이 멈춘 것 처럼 미칠듯한 정적으로 가득한 봄날의 정원. 브루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브루스가 기대어 있는 것에 눈길이 갔다. 회색의 밋밋한 돌덩이였다. 크기만 다른 것 몇개가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것의 개수를 헤아렸다. 하나..둘...셋.........넷. 숨이 가빠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몇번이나 보아왔던 것이었다. 그 위에 음각된 글의 내용도 죄다 외고 있었다. 토마스 웨인, 마사 웨인, 데미안 웨인, 그리고....... 눈길에 네번째 비석에 멎는다. 브루스가 기대어있는 것이다. 봄의 정원은 조용하다.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행복이 날아들었다. 정적이다. 아무 소리도 없이 끝없이 잠든 낮.
움켜쥔 주먹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저릿하게 울려온다. 그러나 주먹을 필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새벽이 다가오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새어들어온 달빛에 눈이 아리다. 입술을 짓씹는다. 비릿한 핏물이 올라오지만 신경쓰지 않고 잘근잘근 물어뜯는다. 내팽개친 시계는 전원이 꺼졌는지 초침이 멎어있다. 끼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웨인저의 저택의 문은 전부 이렇다. 누가 어떻게 여는지에 따라 소리가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한다. 소리가 난다면, 방문을 알리는 표시다. 발걸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시야 속에 두개의 발이 들어온다. 딕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제이슨. 제이슨 토드. 붉은 마스크 위로는 아무런 감정을 읽어낼 수 없다. 별로 읽고 싶지도 않았다.
"제이." "가자." "제이....." "같이 가자."
딕 그레이슨은 침묵에 잠긴 방과 시끄러운 달빛으로 가득한 창 밖을 번갈아 바라본다. 싫다. 침묵은 더이상 싫다. 제이슨 토드는 묵묵히 답을 기다린다. 비참한 것은 떠난 자들이 아닌 남은 자들이다. 잊고 잊고 잊지만 잊을 수 없는, 다시는 채워지지 않을 시꺼먼 구멍. 흐느끼며 딕 그레이슨은 웃는다. 어쩌겠어. 이 조각조각난 남은 자들을 어떻게든 이어붙여 살아 봐야지 뭘 어쩌겠어. 일어선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침묵은 싫다. 그러니까 소음을 만들러 가자.